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정왕후 조씨 (문단 편집) === 대왕대비 === [[1857년]](철종 8년)에 시어머니인 [[순원왕후]]가 [[죽음|승하]]하자 [[대왕대비]]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[* [[철종(조선)|철종]]이 [[순조]]의 [[양자(가족)|양자]]가 되는 형식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[[철종(조선)|철종]]의 아내인 [[철인왕후]]는 신정왕후의 아랫동서가 되고 [[헌종(조선)|헌종]]의 아내인 [[효정왕후]]에겐 숙모가 된다.]이 된다. [[1863년]](철종 14년) 음력 12월에 [[철종(조선)|철종]]도 후사 없이 [[죽음|승하]]하자 신정왕후가 [[조선/왕사|차기 국왕]]을 선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. 이때 [[옥새]]를 확보한 [[안동 김씨]][* [[옥새]]와 내탕고의 열쇠는 [[내명부]]의 수장인 [[왕비|중전]]이 보관하는데 [[철인왕후]]의 친정이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였다. 혹은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의 충고대로 [[철종(조선)|철종]]이 죽자마자 신정왕후가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들이 [[옥새]]를 찾으려 들기 전 미리 [[옥새]]를 찾아 보관해 두었다는 말이 있다.]에 맞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, 이는 교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. 다만 그녀가 지명한 [[조선/왕사|차기 국왕]]이 하필이면 [[고종(대한제국)|흥선군의 차남 명복]]인 걸 보면 정황상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과 그녀 사이에 [[조선/왕사|차기 국왕]] 자리를 놓고 비밀 커넥션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. 실록에는 이들의 커넥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[[야사(역사)|야사]]도 그렇고 몇몇 정황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. 어쨌거나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은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'''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[[효명세자|익종]]의 [[양자(가족)|양자]]로 삼는다'''는 조건으로 [[조선/왕사|왕위 계승]]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면서 결국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의 둘째 아들인 [[고종(대한제국)|이명복]]을 [[효명세자|익종]]과 자신의 [[양자(가족)|양자]]로 삼아 '익성군(翼成君)'으로 봉군하여 즉위시켰다. >'''대왕대비가 국상 중에 정사를 대리할 사람을 정하였고 철종의 뒤를 흥선군의 두 번째 아들로 정하다''' >---- >시임 대신(時任大臣)과 원임 대신(原任大臣)을 '''[[창덕궁 중희당|중희당]](重熙堂)'''에서 소견(召見)하였다. >영중추부사 '''정원용(鄭元容)'''이 아뢰기를, >>"신하와 백성들이 복이 없어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했으니 애통하고 원통하여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." >하니, 대왕대비가 이르기를, >>"죽지 못해 사는 이 몸이 차마 망극하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나니 그저 원통한 생각뿐이다. >>지금 나라의 형세의 안위가 시각을 다투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을 청해 [[종묘]] [[사직]](宗廟社稷)의 큰 계책을 의논하여 정하려는 것이다." >(중략) >하니, 대왕대비가 이르기를, >>"'''[[흥선대원군|흥선군]](興宣君)'''의 적자(嫡子)에서 둘째 아들 '''[[고종(대한제국)|이명복]](李命福)'''으로 >>'''[[효명세자|익종 대왕]](翼宗大王)'''의 [[조선/왕사|대통]](大統)을 입승(入承)하기로 작정하였다." >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1권, 고종 즉위년([[1863년]], 청 동치(同治) 2년) 12월 8일 (경진) 2번째기사''' 고종이 당시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[[대왕대비]]이자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의 법적 어머니로서 [[수렴청정]]을 하였고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의 친부인 [[흥선군]]이 '''대원군(大院君)'''이 되어 집권하였는데, [[조선]] 역사상 [[고종(대한제국)|국왕]]의 [[흥선대원군|생부]]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. 신정왕후는 중앙과 지방에 다음과 같이 유시하여 방계 혈통인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의 [[조선/왕사|정통성]]을 천명하였다. >'''대왕대비가 정통을 이은 것에 대한 교서를 내리다''' >---- >대왕 대비(大王大妃)가 하교하기를, >>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'''[[조선/왕사|대통]](大統)'''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. >>[[정조(조선)|정조]] · [[순조]] · [[효명세자|익종]] · [[헌종(조선)|헌종]]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([[철종(조선)|철종]])에 이르고 [[고종(대한제국)|주상]]께서 이어받았으니, >>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? >> >>그러므로 [[효명세자|익종]]은 '''황고(皇考)'''라 칭하고 [[헌종(조선)|헌종]]은 '''황형(皇兄)'''이라 칭하며, >>[[철종(조선)|대행 대왕]]은 '''황숙고(皇叔考)''', '''효종자(孝從子)'''라고 칭하라. >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1권, 고종 즉위년([[1863년]], 청 동치(同治) 2년) 12월 30일 (임인) 6번째기사''' 이후 3년이 지나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15세가 되자 [[수렴청정]]을 거두고 물러났다. [[흥선대원군]]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는 말도 있는데, [[수렴청정]]하는 [[대왕대비]]가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? 명목상으로는 [[대왕대비]] 신정왕후가 [[수렴청정]]에서 물러나면서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의 친정(親政)이 시작되는 것이다. 물론 실제로는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의 막후(섭정) 정치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. >'''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그만두다''' >'''__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대왕대비의 하교__''' >---- >>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. >>예로부터 [[왕비]]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. >>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? >> >>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, >>나도 '''[[종묘]] [[사직]]'''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. >> >>그러나 지금은 [[고종(대한제국)|주상]]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, >>[[고종(대한제국)|성상]]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, >>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,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, >>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>>나라의 '''체모(體貌, 체면)'''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. >> >>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[[고종(대한제국)|주상]]이 총괄 처리하되, >>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>>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>>[[조선/왕사|우리 선대 임금]]의 가법(家法)을 지키도록 [[고종(대한제국)|주상]]은 힘쓸 것이다. >> >>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>>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. >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3권, 고종 3년([[1866년]], 청 동치(同治) 5년) 2월 13일 (계묘) 1번째기사''' 다만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고 여전히 [[흥선대원군]]이 신정왕후와 의논하여 새 개혁 정책을 짜면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의 입을 빌리거나 [[비망록|비망기]](備忘記)를 내리는 형식으로 여전히 조정의 권력의 한 축이었고, 어찌보면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의 개혁 파트너로 해석할 수도 있다[* 개혁 파트너 설은 [[박시백]] 역시 주장하였지만, [[수렴청정]]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주도적 위치에서는 완전히 빠진 것으로 이해하였고, 이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.]. 그러나 자신의 [[풍양 조씨|친정]]에게 주려는 특혜에 반대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신정왕후가 자신 [[풍양 조씨|친정]]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조건적으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고,[* 바로 얼마전까지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의 [[세도정치|전]][[삼정의 문란|횡]]이 있었는데 눈치 없이 나섰다가는 괜히 미운털 박힐 수 있다.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과 손잡고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을 옹립할 정도인 그녀가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리 없다.] [[조선/왕실|왕실]]의 법도를 보면 [[조선/왕실|왕실]]의 최고 어른인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이 [[고종(대한제국)|왕]]의 [[아버지|생부]]란 이유로 [[며느리]]를 멋대로 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.[* 법적으로는 [[흥선대원군|흥선군]]은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이 [[조선/왕사|왕위]]에 오르면서 [[아버지]]가 아니었다. 오히려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은 익종(=[[효명세자]])의 아들이므로 법적으로는 신정왕후가 어머니로 더 가까웠다.] [[조선/왕사|왕]]의 [[결혼]]은 [[대비]]를 포함한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기 때문. 만약 진짜로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이 신정왕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[[여흥 민씨|외가]] 쪽 친척인 [[명성왕후|명성황후 민씨]]를 밀었다면 오히려 이게 기존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. 아무래도 [[야사(역사)|야사]]인 듯. [[최익현]]의 세 차례 [[탄핵]] [[상소]]로 인한 [[흥선대원군]]의 실각 이후에는,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과 [[명성황후]]가 아버지이자 시아버지를 내쳤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, 그리고 자신들은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이 아닌 신정왕후의 아들 및 며느리라는 걸 궁궐 대, 내외에 보여서 자신들의 [[조선/왕사|정통성]]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,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. [[갑신정변]]이 터졌을 때는 [[궁녀]]들에게 업혀다니면서 여기저기로 피해다니기도 했다. [[수렴청정]]을 거둔 후에는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,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나이인 81세를 일기로 [[1890년]](고종 27년) 4월 17일, [[경복궁 흥복전]]에서 [[죽음|승하]]하였다. >'''대왕대비전께서 승하하다''' >---- >'''미시(未時, 오후 1시~3시)'''에 대왕 대비전(大王大妃殿)께서 [[죽음|승하]]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27권, 고종 27년([[1890년]], 청 광서(光緒) 16년) 4월 17일 (병진) 5번째기사''' >'''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다''' >---- >전교하기를, >>"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미시(未時, 오후 1시~3시)에 대왕 대비전(大王大妃殿)께서 >>'''[[경복궁 흥복전|흥복전]](興福殿)'''에서 [[죽음|승하]](昇遐)하셨다. 망극한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?" >하고, 이어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. >---- >- '''《[[고종실록]]》 27권, 고종 27년([[1890년]], 청 광서(光緒) 16년) 4월 17일 (병진) 6번째기사''' 생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[[1890년]](고종 27년)까지 살았기 때문에 개화([[강화도 조약]])가 진행되는 것도 지켜보았던 인물. 연도만 보면 잘 감이 안올 수 있는데, [[제중원]](1885년), [[이화학당]] 설립(1886년), [[영어]] 등 서양 외국어 교육 실시(육영공원 설입,1886년), [[경복궁]]에 [[전기]]가 들어올 때도(1887년) 생존해 있었다. 그래서 신정왕후의 3년상을 [[전화기]]를 써서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. 당장 그의 장례식 리허설에는 지구 반대편의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에서 온 블라디미르 폰 키텔의 사절단도 참관했다. [[혜경궁 홍씨|혜경궁]]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 사람도 오래 산 만큼 많은 아픔을 겪었다. 남편 [[효명세자]]와 아들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모두 20대 초반에 [[요절]]했던 만큼 외로움과 한이 컸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